버트 트라우트만 :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
이름 : 버트 트라우트먼
(Bernhard Carl Trautmann)
국적 : 독일
출생지 / 생년월일 : 독일 브레멘 / 1923년 10월 22일
키 : 189 cm
맨체스터 시티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 당대 잉글랜드 리그 최고의 수문장.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라 평가 받는 러시아의 레프 야신은 트라우트먼을 두고 "세계에는 최고의 골키퍼가 둘 있다. 한 명은 나 레프 야신이고, 한 명은 맨체스터 시티에 있는 트라우트먼이다."라며 극찬을 할 정도로 그 기량을 인정 받았던 동시대 최고의 골키퍼였다. 또한 FWA 올해의 선수상을 골키퍼 신분으로 받은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
# 맨시티로 향하기 전까지
독일 브레멘에서 태어난 버트 트라우트먼은 1930년대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고, 결국 그의 아버지가 집을 팔아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어린 시절 트라우트먼은 축구와 야구 등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고, 작은 축구 클럽과 YMCA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축구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1933년에는 히틀러 유겐트의 새로운 조직인 독일 소년단에 가입했는데, 이듬해에는 여러 국내 주니어 육상 대회를 석권하며 운동에 재능을 발견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버트 트라우트먼은 나치 독일군의 루프트바페(공군)에 무선 통신사로 들어갔다. 이후 나치 독일군으로써 전쟁에 참가했었는데, 1944년 독일 클레베에서 살아남은 몇 안되는 독일군 중 한 명이었던 그는 결국 미국 군인 둘에게 발각되어 잡혔다. 그 자리에서 죽음을 직감했던 트라우트먼은 미군들로부터 도망을 쳤으나, 결국 영국군들에게 붙잡혔다. 이후 잉글랜드 에식스에 위치한 수용소로 옮겨져 여러 심문을 받고 포로 수용소에 여러 포로들과 함께 수감되었다. PoW 수용소가 폐쇄되던 1948년까지 현지인들과 함께 그곳에서 머물렀고, 수용소가 폐쇄되자 본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고 영국에 머물기로 결정했으며, 머지사이드 주에 위치한 세인트헬렌스 아마추어 축구 클럽에 들어가 축구 커리어를 시작했다. 1948-1949 시즌, 버트 트라우트먼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특히 잉글랜드 국내 컵 대회였던 조지 마혼 컵에서의 활약상은 많은 대중들에게 그의 퍼포먼스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 맨체스터 시티
나치 독일군 출신에서, 맨체스터 시티의 영원한 전설로
세인트 헬렌스에서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뛰어난 선방 능력을 입증한 버트 트라우트먼은 풋볼 리그의 여러 클럽들에게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먼저 오퍼를 넣은 구단은 당시 1부 리그에 있었던 맨체스터 시티였다. 1949년 10월 7일, 트라우트먼은 맨체스터 시티에 아마추어로 합류했고, 얼마 안가 프로 계약을 맺으면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더해서 아디다스의 창립자인 아돌프 다슬러와의 인연으로 아디다스를 입은 최초의 스포츠 선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맨시티에 합류할 때 대중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나치 독일군 출신 선수가 자신들이 응원하는 클럽에 합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할 사람이 당시에 누가 있었을까. 결국 맨체스터 시티의 서포터들은 보이콧을 선언했으며, 맨체스터는 물론 전국 각지의 여러 축구 클럽들이 맨체스터 시티를 비판하는 서안을 보내는 등 당시의 여론은 정말 최악이었다. 하지만, 당시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이자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던 2차 대전 참전 용사 에릭 웨스트우드는 "우리 드레싱룸에 전쟁이란 없다"라며 공개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트라우트먼은 맨시티의 또 다른 전설적인 골키퍼 프랭크 스위프트를 대신해 맨시티의 새로운 수문장으로 등장했고, 데뷔전은 11월 19일 볼튼 원더러스와의 경기였다. 이후 있었던 첫 홈 경기에서 경기를 보러온 맨시티의 팬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입증한 그는 자신을 향한 불만들을 점차 줄여나갔다. 이듬해 1월 풀럼을 상대로 런던에서의 첫 경기를 가졌는데, 런던을 중심으로 있었던 여러 영국의 언론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나치 독일군 출신의 축구 선수가 영국의 수도에서 축구 경기에 나선다고 하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경기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풀럼에게 1-0의 스코어로 패했지만, 경기 내내 트라우트먼이 환상적인 선방 쇼를 보여준 덕분에 맨시티가 대패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아쉬운 1점차 패에서 그쳤던 것이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트라우트먼은 기립 박수 속에서 퇴장했다. 나치 독일군 출신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달고 살았던 그가 축구 선수로, 영국이라는 국가에서 완전히 인정 받는 순간이었다.
이후 트라우트먼은 맨체스터 시티를 넘어 잉글랜드 풋볼 리그 내 최고의 위상을 가진 골키퍼로 자리매김했고, 그의 명성은 조국인 독일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독일의 명문 축구 클럽 샬케 04-아이러니하게도 샬케는 히틀러가 사랑했던 클럽이다.-는 맨체스터 시티에게 1000 파운드의 금액으로 트라우트먼의 이적을 문의하기도 했는데, 맨체스터 시티는 이에 대해 트라우트먼은 20배는 더 가치 있는 선수라며 거절했다. 1950년대 중반, 당시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이었던 레스 맥도웰은 볼 점유율을 중시하는 스타일의 축구를 지향했는데, 이 때문에 트라우트먼은 매직 마자르-1950년대의 헝가리 국가대표 팀-의 수문장 그로시치 줄러의 영향을 받아 하프백들을 이용한 패스 플레이에 능했다. 어찌 본다면 스위퍼형 골키퍼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는 그로시치 줄러의 플레이와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맨체스터 시티는 1955년에 FA컵 결승에 진출했고,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이 결승 경기는 비록 맨체스터 시티의 패배로 끝이 났지만 트라우트먼은 FA컵 결승에 진출한 최초의 독일 선수로 남게 된다. 1955-1956 시즌은 리그 4위로 마무리했고, 트라우트먼은 팀의 4위 안착과 또 한 번의 FA컵 결승 진출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선수로 인정 받고 FWA 올해의 선수상을 최초로 수상한 골키퍼-두번째로 수상한 골키퍼는 고든 뱅크스-가 되었다. 상을 수상하고 이틀 뒤가 바로 버밍엄과의 FA컵 결승 경기. 당시 경기는 3-1로 맨체스터 시티가 유리한 상황으로 흘렀는데, 75분 경 트라우트먼은 다이빙을 하던 중 버밍엄의 피터 머피와 강하게 충돌했다. 피터 머피의 무릎이 트라우트먼의 목을 강타한 것이다. 당시에는 교체 선수가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트라우트먼은 고통 속에서 경기를 계속해야만 했다. 그는 남은 15분 동안 고통 속에서 피터 머피의 슈팅을 또 한 번 막아내며 최고의 선방을 보여주었고, 맨시티는 마침내 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트라우트먼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느꼈는데, 엑스레이 촬영 결과 다섯 개의 척추뼈가 탈구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두번째 뼈는 둘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트라우트먼의 회복은 꽤나 오랜 기간이 필요했다. 결국 1956-1957 시즌의 대부분을 놓치면서 전 시즌의 절반 가량인 21경기에만 출전할 수 있었으며, 복귀한 이후의 트라우트먼은 부상 전에 보여주었던 경기력들보다는 조금 못미치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되었다. 1964년 4월 15일, 그는 15년간 맨체스터 시티에서만 545경기를 소화한 끝에 은퇴 경기를 마무리지었고, 맨시티의 전설로 남았다.
나치 독일군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실력으로 입증해야만 했던 당대 잉글랜드 풋볼 리그 최고의 골키퍼, 버트 트라우트먼. 21세기에 부상으로 인해 최절정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게 된 페트르 체흐가 있다면, 과거에는 버트 트라우트먼이 있었다. 당시 독일 국가대표 팀이 자국 리그 선수들로만 선수단을 구성했고, 스스로도 독일 국가대표 팀 차출을 거부하며 국가대표 경력이 전무했던 그이지만, 여전히 맨체스터 시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골키퍼로 기억되고 있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 '버트 트라우트먼' 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