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의 역사 - 04. 현대축구와 골키퍼 1
1970년대 리누스 미헬스 감독과 요한 크루이프라는 천재 선수가 만들어냈던 '토탈 풋볼'이라는 전술사적 혁명은 세계 축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적 혁명 속에서 골키퍼 역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했다. 물론 앞서 순차적으로 알아봤던 골키퍼의 흐름을 통해 전통적인 틀을 깬 '스위퍼 골키퍼'의 개념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토탈 풋볼이 강타했던 1970년대 이후부터는 또 어떤 변화가 찾아왔던 것일까.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남긴 토탈 풋볼의 색채와 함께 유로피언 컵 3연패를 이끌었던 당시 아약스의 수문장은 하인즈 스튀라는 선수였다. 당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인 제프 마이어와 함께 유로피언 컵 결승에 3회 연속 진출 후 모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하인즈 스튀였으나, 오늘 알아볼 골키퍼는 그가 아니다. 물론 그가 아약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축 멤버임은 확실하지만, 토탈 풋볼에서 요구되었던-마치 1950년대 헝가리 국가대표 팀에서 그로시치 줄러와 같은- 스위퍼 골키퍼의 역할로써 네덜란드를 대표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1974년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기 전까지 오렌지 군단의 수문장은 얀 반 베버렌이었다. PSV 에인트호번 소속으로 1970년대 네덜란드 축구를 대표하는 수문장이자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던 베버렌은 크루이프와 미헬스 감독이 만나 네덜란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 받았던 1974년의 월드컵 무대를 밟아보지도 못했다. 당시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은 당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 요한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네덜란드 축구 협회 역시 네덜란드의 축구 위상을 역대 최고점으로 옮겨준 크루이프라는 선수를 편애했다. 이러한 문제는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지불되는 돈과 관련된 문제로 이어졌고, 이에 불만을 가졌던 얀 반 베버렌은 실력적으로 네덜란드 최고의 수문장임이 틀림 없었으나, 스타 플레이어와 그를 향한 편애 속에서 국가대표팀 승선에 실패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골키퍼 장갑을 낀 것이 바로 위 사진 속 인물, 얀 용블루트다.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당시의 네덜란드 대표팀은 얀 반 베버렌이라는 피해자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얀 용블루트라는 수혜자 역시 등장케 했다. 우리가 흔히들 언급하는 '스위퍼 골키퍼'라는 개념이 다시금 등장하는 시점이다. 앞서 언급한 얀 반 베버렌과 얀 용블루트는 당시 네덜란드 축구의 양면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가 될 수도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얀 반 베버렌의 플레이 스타일은 굉장히 클래식했다. 엄청난 반사 신경을 주무기로 놀라운 선방 능력을 보여주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삼고, 골대 앞을 잘 벗어나지 않았다. 반면 얀 용블루트의 스타일은 과감하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그로시치 줄러, 레프 야신과 같이 패널티 박스를 벗어나 직접적으로 수비 상황에 관여했다. 이는 토탈 풋볼을 상징하는 '전부 공격, 전부 수비'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올드스쿨의 극치로써 미헬스 감독의 축구 철학에 반하는 골키퍼이자 당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 크루이프와 마찰이 있었던 얀 반 베버렌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사에서는 그 이름을 제대로 남기지 못했고, 토탈 풋볼에 어울리는 스위퍼 골키퍼의 모습을 갖춘 선수로써 미헬스 감독의 선택을 받았던 용블루트는 자신의 조국을 대표하며 그 역사에 당당히 이름을 새기는데 성공했다.
얀 반 베버렌과 요한 크루이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추후에 따로 다뤄볼 예정.
1970년대를 지배했던 네덜란드와 네덜란드의 수문장들을 만나보았다. 그렇다면, 오렌지 군단과 아약스를 넘어서고 1970년대에 또 다른 황금기를 맞이했던 국가와 그 국가의 수문장을 만나볼 차례다.
리누스 미헬스와 요한 크루이프의 아약스, 그리고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에 대적했던 팀이라면 역시 바이에른 뮌헨과 서독이지 않을까. 1970년대 초반 유로피언 컵 3연패에 성공한 아약스를 뒤로 하고 곧이어 다시금 3연패를 하는 구단이 등장했는데, 그 구단이 바로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를 앞세운 독일의 명문 구단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이어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이 베켄바워와 크루이프는 각각 서독과 네덜란드의 대표로써 결승전에서 맞붙으며 세기의 라이벌을 형성했다. 이들 뒤에 감춰진 또 다른 골키퍼, 사실 감춰졌다기엔 앞에서 언급한 네덜란드 골키퍼들에 비해 굉장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 제프 마이어가 있다.
리누스 미헬스의 혁신적인 철학과 그 중심에 있었던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 축구가 앞서 언급한 여러 트러블을 겪으며 월드컵 준우승에서 마무리했다면, 서독은 그 대척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골문을 지켜야 했던 골키퍼의 이야기 역시 굉장히 다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네덜란드는 월드컵에 내보낼 수문장을 대회 직전에서야 결정했다.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한 파벌 문제는 당대 네덜란드 최고의 수문장을 피해자로 내몰았다.
반면 서독의 제프 마이어는 국가대표로써 탄탄대로를 걸어온 인물이다. 1960년대 초 독일 유소년 국가대표팀부터 단계를 밟았던 마이어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시작으로 총 4번의 월드컵 무대를 경험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때부터 주전 골키퍼로 선택되었던 그는 1972년 유로 우승에 이어 대척점에 서있던 네덜란드를 상대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위대한 수문장으로 기록되었다.
축구계의 혁명으로 다가왔던 네덜란드 축구는 1980년대 에인트호번의 트레블과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복귀와 함께 이뤄낸 1988년 유로 우승 이전까지 월드컵 본선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주춤하게 되었고, 이후 한스 반 브뢰켈런이라는 위대한 수문장과 함께 트레블을 이뤄낸 에인트호번을 중심으로 네덜란드 축구는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그렇게 새 단장을 시작한 네덜란드에 또 다른 혁신적인 골키퍼가 한 명 등장하는데, 축구계의 혁명과도 같이 등장했던 토탈 풋볼을 계승한 요한 크루이프의 '크루이프즘'을 모티브로 자신의 축구를 시작한 루이 반 할 감독 아래 '스위퍼 골키퍼'라는 존재로써 모습을 드러낸 에드윈 반 데 사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