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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키퍼의 역사 - 02. 스위퍼 골키퍼의 뿌리축구 역사 2020. 7. 6. 22:44
1931년, 근대 축구가 현대 축구의 근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골키퍼에 관한 규정은 '패널티 에어리어 내에서 어떠한 목적으로든 핸들링이 가능하지만, 공을 옮기는 과정에서 4발짝의 움직임만을 허용한다'로 정립되었고, 이 규정은 1990년대에 들어서기 이전까지 그 어떤 변화도 없이 골키퍼의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번에 다룬 골키퍼의 '개념'은 위와 같이 정해졌다. 그렇다면,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60년의 기간 동안, 골키퍼라는 포지션은 정말 조금의 변화도 없이 똑같이 유지되어 왔을까? 우선, 골키퍼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띄는 골키퍼 규정에 대해서는 이미 알아봤으니, 골키퍼와 관련된 또 다른 규정을 알아보자.
VAR이 도입된 요즘 공격수들이 기록한 골이 취소가 되는 경우가 빈번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오프사이드'일 것이다. 골키퍼의 수비 범위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이 오프사이드 규정은 놀랍게도 1848년, 축구 역사상 최초의 보편적인 축구 규칙이라 할 수 있는 '케임브리지 규칙'에서 처음 제시된 개념이다-과거에 오프사이드가 없었다는 인터넷상의 낭설은 전부 거짓이다-.
이후 축구 협회가 창설되고, 처음 시도된 오프사이드 규정은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오프사이드보다 훨씬 더 공격수에게 불리한 모습이었다. 당시 오프사이드의 기준은 '볼을 받아야 하는 공격수와 골대 사이에 수비수(골키퍼 포함)가 3명 이상이 있을 경우'에만 공격수를 향한 전진 패스가 허용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근대 축구 초기의 축구팀들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포메이션들을 내세워 경기에 임했는데, 1-2-7, 2-2-6, 2-3-5(피라미드) 등 수비수의 숫자보다 공격수의 숫자가 월등히 많은 굉장히 공격적인 포메이션들이 형성되었다. 이는 오프사이드 규정이 수비수의 부담을 현저히 줄였기에 가능했던 포메이션들이다.
근대 축구 초기에 정립된 이 오프사이드 규정은 20세기 초반까지 공격수들의 공격적인 움직임을 제한하고, 수비수들의 부담을 덜게 하는 모습으로 아무런 변화 없이 쭉 이어졌는데, 이는 골키퍼의 수비 범위 역시 그리 넓지 않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 역시 했다.
이러한 공격적인 움직임에 제한을 두는 오프사이드 규정이 '완화'된 시기는 1920년대에 접어든 이후였는데, 정확히는 1925년부터였다. 앞서 언급한 '공격수와 골대 사이에 수비수(골키퍼 포함)가 3명 이상이 있을 경우'에만 전진 패스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2명'으로 변경된 것이다. 이는 1990년대에 들어서 골키퍼의 백패스 금지 조항이 생성되는 시기와 맞물려 공격수가 수비수와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을 허용하기 이전까지 약 60년간 아무런 변화 없이 유지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골키퍼라는 포지션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규정들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골키퍼라는 포지션이 어떠한 쓰임새를 갖고 변화해 왔는지를 알아볼 차례이다. 필자는 제목을 굉장히 거창하게 적어놓았다. '스위퍼 골키퍼의 뿌리'라고. 아쉽게도 이번에 다룰 내용은 스위퍼 골키퍼의 직접적인 발전과 약간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스위퍼 골키퍼의 등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뿌리가 되는 축구 전술의 흐름을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위 사진 속 포메이션은 3-2-5, 혹은 3-2-2-3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편의상 많은 사람들이 'WM 시스템'이라고 표현한다. 아스날의 위대한 감독인 허버트 채프먼은 근대 축구의 개념이 탈피되는 1920년대 중후반, 앞서 언급한 WM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1925년, 앞서 언급한 오프사이드 규정의 변화로 인해 더 이상 '2명의 수비수'만으로 수비에 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허버트 채프먼 감독은 2-3-5 시스템에서의 센터 하프를 수비 진영으로 깊숙하게 내렸고, 이와 동시에 인사이드 포워드의 위치를 위 사진과 같이 조금 더 내리면서 W-M의 모양을 완성시켰다. 이를 통해 백2의 개념이 완전히 뒤집혀지며, 축구의 기본적인 전술은 WM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백3가 되었으며, 이는 195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 WM 전술을 다시 한 번 뒤집으며 유럽 축구계는 물론 당대 세계 최강의 팀으로 불리게 되는 헝가리 국가대표 팀에서 MM 전술이 등장한다.
당시 헝가리 국가대표 팀의 감독인 구스타프 세베슈가 내세웠던 축구는 '사회주의식 축구'였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사실 구스타프 세베슈 감독은 한 축구 팀의 감독이기 전에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던 사회주의 사상가였다. 이에 따라 그가 내놓았던 축구의 가장 커다란 틀은 '모두가 공격하고, 모두가 수비한다'였다. 모든 선수들이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모든 포지션을 어느 정도 소화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 세베슈 감독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것을 현대 축구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여러 전술적 요소 중 하나로 생각 중이며, 1970년대 리누스 미헬스 감독을 통해 집대성된 '토탈 풋볼'의 원형, 초기 단계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알아볼 것은 축구 전술의 역사가 아니니, 현대 축구의 근간이 되는 두 전술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만 하고 넘어가겠다. 위 사진 속 인물은 당시 구스타프 세베슈 감독의 지휘 아래 헝가리 대표팀의 골문을 지켰던 수문장, '그로시치 줄러'이다. 그는 구스타프 세베슈의 모든 선수가 모든 포지션을 어느 정도 감당이 가능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식 축구'에 입각하여, 단순히 골문을 지키는 이전까지의 골키퍼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 최초의 선수였다.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마누엘 노이어, 에데르송 등의 골키퍼와는 조금의 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그는 확실하게 '또 하나의 수비수' 역할까지 맡았던 '스위퍼 골키퍼'의 시작이다. 이전까지의 골키퍼들은 굉장히 클래식한 방향으로 골키퍼 역할을 수행했다. 줄러는 우리가 골키퍼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슈팅에 대한 방어와 골문 앞에서의 영향력 이외에 공격수들에 대한 '직접적인 압박'으로 공격 전개 자체를 방해했으며, 이에 따른 넓은 수비 범위로 헝가리 대표팀의 수비진들은 상대팀 진영으로 올라서는 강도 높은 압박 전개를 할 수 있었다.
그로시치 줄러가 유럽 축구사에서 '골키퍼의 수비 범위 확장'이라는 개념으로 스위퍼 골키퍼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동시대인 1950년대 남미에는 '킥을 활용한 공격 전개'라는 개념으로 스위퍼 골키퍼의 또 다른 시작을 알렸던 '아마데오 카리조' 골키퍼가 있었다.
3편 '스위퍼 골키퍼의 발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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