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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키퍼의 역사 - 03. 스위퍼 골키퍼의 발전축구 역사 2020. 7. 10. 01:17
지난번에 우리는 전술 발전의 흐름에 따른 골키퍼의 역할 변화를 알아보았다. 1930년대 유럽 축구를 지배했던 WM 전술을 간파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계속되었고, 마톤 부코비가 고안하고 구스타프 세베슈가 완성시킨 MM 전술 속에서 축구 역사상 최초의 '스위퍼 골키퍼'가 등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스위퍼 골키퍼의 등장은 유럽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다.
1940년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축구팀은 어디인가. 하나는 '그란데 토리노'라 불렸던 이탈리아의 토리노이고, 또 하나는 남미 축구의 정점이라 불렸던 아르헨티나의 '리베르 플라테(리버 플레이트)'라고 답할 수 있다. 갑자기 이 질문을 왜 하는지 궁금한가?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언급한 '유럽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다'의 주인공이 리베르 플라테에서 등장했으니까.
1940년대 남미 축구의 정점에 올랐던 리베르 플라테의 골문을 지켰던 골키퍼가 있다. 바로 위 사진 속 인물인 '아마데오 카리조'. 1945년 열아홉의 나이에 위대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리베르 플라테에서 데뷔했던 아마데오 카리조 골키퍼는 향후 23년간 리베르 플라테의 골문을 지키는 위대한 수문장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가 각별히 기억되는 한 가지의 이유는, 역시 '스위퍼 골키퍼의 시발점'이라는 의미가 크지 않을까.
스위퍼 골키퍼에 가깝다고 느꼈던 여러 남미 골키퍼들이 있다. 'El Loco(미친 사람)'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르헨티나의 휴고 가티, 콜롬비아의 레네 이기타, '골 넣는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등. 우리는 '기행'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여러 골키퍼들을 알고 있다. 남미 축구에서는 이들을 두고 스위퍼 골키퍼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며, 대신 'Loco Style(미친 스타일)'이라는 표현을 이용했다. 그리고 이 스타일의 골키퍼 계보를 시작한 장본인이 바로 아마데오 카리조 골키퍼이다.
아마데오 카리조는 '킥을 이용한 공격 전개'라는 개념에서 스위퍼 골키퍼의 시작이라 이야기하는데, 그는 실제로 디 스테파노와 같은 상당히 뛰어난 공격진들을 향해 직접적인 롱 패스를 뿌려주며 공격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비를 위해 가끔 페널티 에어리어를 벗어나 상대팀 공격수들에게 압박을 가하거나 공을 빼앗고 걷어내는 등의 범위 넓은 플레이까지 선보였는데, 이전까지 골키퍼의 이러한 플레이를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대 남미 축구인들의 시선이라면 이는 당연히 'Loco Style'이 분명했다.
위 사진의 주인공은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라 불리는 사나이, 레프 야신이다. 그는 디나모 모스크바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이자 러시아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이며, 골키퍼의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야신이 이렇게 어마어마한 평가를 받게 된 이유로 가장 표면적인 것은 '발롱도르를 수상한 유일한 골키퍼'라는 타이틀인데, 또 다른 시각에서는 그를 '스위퍼 골키퍼'의 또 다른 흔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과연 레프 야신이라는 골키퍼가 고작 '선방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오랜 시간동안 '역사상 최고'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답변부터 하자면, 아니다. 레프 야신이라는 골키퍼가 그가 활약했던 1960년대의 다른 골키퍼들과 가장 이질적으로 차이가 났던 부분이 무엇일까. 그는 놀랍게도 우리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스위퍼 골키퍼'의 움직임을 보였던 초기의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이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당대 골키퍼들이 어떠한 플레이들을 펼쳤는지 알아보고 가자. 야신이 활약하던 1960년대 초반의 골키퍼들은 공을 손으로 잡고 던지거나 혹은 롱 킥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행동의 목적은 '시간 끌기'. 상대 공격수로부터 선방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공을 탈취한 골키퍼가 그 공을 수비수에게 넘겨주면, 수비수는 다시 골키퍼에게 공을 넘겨준다. 그리고 골키퍼는 공을 손으로 잡고 몇 초간 시간을 끈 이후 다시 수비수에게 공을 돌려주거나 공을 최대한 멀리 차서 시간을 끄는 식으로 플레이했다.
이는 당시 골키퍼라는 포지션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플레이였는데, 레프 야신은 이런 플레이를 완고히 거부했던 골키퍼였다. 야신은 골키퍼가 공을 소유하게 된 '짧은 시간'을 상대 팀의 수비가 전열을 가다듬기 이전의 '기회'로 보았고, 상대 팀이 제대로 된 수비 포메이션을 갖추기 전에 빈 공간을 노리는 패스를 뿌려 역습을 하고자 했다. 공을 패널티 에어리어 안에 있거나 바로 앞에 위치한 수비수에게 전달하는 선택지보다 공격 작업으로 인해 빈 공간을 노출한 상대 팀 진영 혹은 그 근처로 침투하는 자기 팀의 공격수에게 던지기나 킥을 이용해 전달하는 선택지를 우선 순위로 둔다는 게 레프 야신이라는 선수의 '골키퍼 철학'이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있었는데, 그가 발롱도르를 수상한 해인 1963년에 있었던 잉글랜드와 유럽&남미 축구 스타팀 사이의 친선전이 그 예이다. 그는 이 경기에서 당대 잉글랜드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뛰어난 선방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앞서 언급한 여러 공격적인 시도들을 그대로 보여줬다.
야신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한 번 축구 전술의 흐름을 살펴보자. 벨라 구트만 감독에 의해 MM 전술이 전 세계로 퍼지고 이것이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4-2-4 시스템으로 이어지는 흐름 뒤에 유럽 축구는 '카테나치오'의 지배를 받는다. 스위스의 칼 라판 감독에 의해 제시되었던 '리베로'의 개념과 함께 네레오 로코 감독과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을 거치며 비로소 완성의 단계에 접어들었던 카테나치오는 1960년대 유럽 축구계에서 '스위퍼 골키퍼'의 존재를 점차 잊게끔 만들었다. 스위퍼 골키퍼의 등장을 가능케 했던 지배적이고 공격적이었던 축구 전술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리베로'라는 공수 양면에서 '프리롤'을 수행하는 최후방 수비수가 등장하면서 굳이 골키퍼가 스위퍼가 위치하는 곳까지 올라서서 수비 혹은 공격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는, 그 필요성 자체가 적어진 것이다. 앞서 야신의 골키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당대 골키퍼들에게 당연했던 수비 우선적 플레이는 이러한 이유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다시금 스위퍼 골키퍼의 필요성을 '전술적'으로 내놓았던 시대는 언제였을까? 바로 리누스 미헬스 감독을 통해 '토탈 풋볼'의 개념이 제시되면서 부터이다. 네덜란드에서 꽃 피운 토탈 풋볼과 함께 유럽 축구사에는 다시 한 번 스위퍼 골키퍼라 칭할만한 새로운 선수들이 등장한다.
4편 '현대 축구와 골키퍼'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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