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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뱅크스 :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축구 연재/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 2019. 4. 24. 01:47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는 과연 누구일까요? 언제나 거론되는 과거 최고의 골키퍼들은 물론이고, 그에 비견되는 현대 축구사의 골키퍼들까지. 수많은 골키퍼들이 축구사에 이름을 남기고, 화려한 선방을 보여주며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오늘부터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을 알아볼 예정입니다.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써볼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래 본문부터는 편의상 반말로 작성되었으니,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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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든 뱅크스 (Gordon Banks)
국적 : 영국 (잉글랜드)
출생지 / 생년월일 : 잉글랜드 사우스요크셔 주 셰필드 / 1937년 12월 30일
키 : 185cm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로 평가 받는 잉글랜드의 레전드이지만, 1972년 교통사고로 인해 안타깝게 한쪽 눈을 실명한 비운의 수문장. EFL(English Football League)에서 15년간 628경기를 뛰었으며, 국가대표로 73경기를 소화했다. IFFHS(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에서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골키퍼 2위(1위는 레프 야신)에 선정된 적도 있고, 1972년 FWA(잉글랜드 축구기자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지난 시즌 수상자는 모하메드 살라)을 수상했다.
# 월드컵 이전까지
밀스퍼 FC에서 뛰기 시작한 그는 체스터필드로부터 스카웃을 받고 1953년 3월 유스 경기에서 여섯 번 출전했는데, 이 경기들을 통해 그 해 7월 팀으로부터 계약 제의를 받았다. 그는 1958년 11월, 콜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론 파웰을 대신하여 출전하면서 성인 팀에 데뷔했다. 이후 뱅크스는 팀의 주전 골키퍼로 자리를 잡았고, 부상으로 빠진 3경기를 제외하면 1958-1959 시즌은 모두 주전으로 출전했다. 그러던 1959년 7월, 당시 3부 리그 팀인 체스터필드의 주전 골키퍼에 불과했던 고든 뱅크스에게 1부 리그 팀인 레스터 시티로부터 7000 파운드의 금액으로 이적 제의가 들어왔고, 그는 레스터 시티로 팀을 옮겼다.
두 번의 FA컵 준우승과 한 번의 리그컵 우승
고든 뱅크스는 당시 레스터 시티에서 총 5명의 골키퍼와 경쟁을 해야만 했다. 그는 팀의 백업 골키퍼로 벤치에 있었지만 주전은 데이브 맥라렌이었고, 맥라렌이 부상을 입기 전까지 선발로 나오지 못했다. 이후 맥라렌이 부상에서 돌아온 직후 5경기에서 무려 14골이나 실점하는 안좋은 모습을 보여주자, 뱅크스가 주전 골키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에버튼과의 경기에서 6골을 허용하는 등 초반에는 부진했으나 점차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며 레스터 시티의 12위 안착에 힘을 보탰고, 이후 맥라렌이 팀을 떠나면서 팀의 확고한 주전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1960-1961 시즌 그가 속한 레스터 시티는 6위로 시즌을 마쳤는데, 무엇보다 FA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함에 있어 뱅크스의 활약이 빛났다. 그는 FA컵에서 9경기 동안 5실점 밖에 하지 않았고, 결승 상대가 당시 리그 우승팀이었던 토트넘 핫스퍼라는 점을 감안하면 준우승의 기록은 뱅크스와 레스터 시티에게 있어서 정말 준수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시즌 레스터 시티의 기록은 14위에 그쳤고, 뱅크스도 이렇다 할 활약상 없이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이후 1962-1963 시즌, 레스터 시티는 또 한 번 FA컵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4강에서 리버풀을 만난 뱅크스는 34개의 슈팅을 막아내는 미친 선방 쇼를 보여주며 클린시트로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말 불행하게도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의 경기에서 손가락이 부러진 뱅크스는 남은 경기에 출전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뱅크스가 빠진 레스터 시티는 남은 경기를 모두 패할 정도로 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이는 뱅크스가 팀에서 수비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후 뱅크스 없는 레스터는 FA컵 결승 경기에서마저 맨유에게 패한다.
그 다음 시즌 뱅크스는 자신의 커리어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레스터 시티의 리그 성적은 11위에 그쳤으나, 리그 컵 결승에서 스토크 시티를 만나 1-1과 3-2, 총합 4-3의 스코어로 이기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 다음 시즌인 1964-1965 시즌 그는 주급 인상을 원했고 구단과의 마찰로 팀에 이적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 속에 레스터 시티는 리그 18위, FA컵 6라운드 탈락 등 부진했고 리그컵에서는 결승에서 첼시에게 패하며 우승컵을 내주었다. 이후 프리 시즌 경기에서 손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뱅크스는 9경기를 결장했고, 1965-1966 시즌 팀은 7위에 그쳤다.
# 1966 잉글랜드 월드컵
그는 클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잉글랜드의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주전 골키퍼가 되었다. 뱅크스 외의 국가대표로 뽑힌 골키퍼가 피터 보네티-첼시의 전설적인 수문장-와 론 스프링제트-셰필드 웬즈데이의 전설적인 수문장-였다는 걸 생각하면 당대 뱅크스가 얼마나 대단한 골키퍼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잉글랜드의 주전 골키퍼로 조별리그 내내 단 한 골도 실점하지 않고 최고의 퍼포먼스를 자랑했다. 잉글랜드는 첫 경기 우루과이전에서 0-0 무승부-이 경기는 우루과이가 완전히 내려앉아 공격 시도를 거의 안했던 경기-, 멕시코전 2-0 승, 프랑스전 2-0 승리를 바탕으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잡고, 4강에서 포르투갈을 상대로 2-1로 승리하며 결승까지 갔는데,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우-포르투갈의 전설적인 공격수,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득점왕-가 넣은 골이 PK였기 때문에 고든 뱅크스는 결승 이전까지 단 한 번의 필드 골도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만큼 뱅크스는 뛰어난 골키퍼였지만, 결승전에서는 조금 달랐다.
뱅크스는 12분만에 실점을 허용했다. 골의 주인공은 볼로냐와 유벤투스 등에서 활약한 서독의 공격수 헬무트 할러. 할러는 골대 구석으로 정확히 슛을 찼고 뱅크스는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물론 실점 이후 6분만에 지프 허스트의 동점골이 터졌고, 78분 마틴 피터스의 역전골까지 터지며 자국 대회에서 우승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 종료를 앞둔 상황에서, 로타르 에머리히의 프리킥이 볼프강 웨버에게 떨어졌고 웨버는 극장 동점골을 기록하게 된다. 이후 계속된 연장전에서 서독은 잉글랜드를 상대로 계속해서 슈팅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뱅크스에게 막히며 무용지물이었고,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허스트의 활약으로 잉글랜드는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 월드컵 이후 ~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월드컵의 우승을 이끈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피터 쉴튼-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식 경기에 출전한 축구 선수이자 골키퍼-의 등장으로 1966-1967 시즌 말부터는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당시 레스터 시티의 감독인 매트 길리스는 뱅크스를 두고 전성기가 지난 선수라고 했고, 쉴튼 골키퍼는 자신이 넘버원 골리가 아니라면 팀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뱅크스에게는 안좋은 상황들이 겹치게 된다. 하지만 당대 비싼 몸값의 선수였던 뱅크스를 여러 구단들은 사오기를 꺼려했고, 결국 중위권 팀인 스토크 시티로 이적한다.
그의 마지막 전성기
고든 뱅크스는 스토크 시티로 팀을 옮길 때, 레스터 시티와의 여러 마찰이 있었다. 레스터 시티를 떠날 당시, 뱅크스는 구단에게 보상금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스토크 시티가 대신 그 돈을 지불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스토크 시티의 감독인 토니 와딩턴은 뱅크스를 높게 평가했고, 존 파머를 대신해 주전 골키퍼로 1966-1967 마지막 네 경기에 선발 출장시켰다. 이후 전 소속팀인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왔고, 스토크 시티의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몇 시즌 간 스토크 시티의 뛰어난 수문장으로 경기에 나왔다.
이후 그는 또 한 번 잉글랜드의 넘버 원 수문장으로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나선다. 당시 잉글랜드는 브라질,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와 한 조에 속했는데, 뱅크스의 인생 선방이 나왔던 인생 경기는 당연히 브라질과의 경기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축구사의 길이 남을 명장면. 물론 잉글랜드는 토너먼트에서 게르트 뮐러-1970 멕시코 월드컵 득점왕, 1970 발롱도르 수상자-, 우베 젤러,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골을 용납하고 서독에 패해 탈락하지만, 이 대회에서 뱅크스가 보여준 선방 능력은 가히 당대 최고의 골키퍼라고 평가 받아 마땅했다. 축구 황제 펠레는 자신이 본 선방 중 최고라고 극찬했었고, 자신의 선수 생활 중 가장 잘 맞은 헤딩 슛을 막은 뱅크스를 늘 칭찬했다.
대회 이후 뱅크스는 스토크 시티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스토크 시티는 1970-1971 시즌 아스날을 잡는 등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였음에도 중위권에 그치게 되었지만, FA컵 준결승에 진출했고, 아스날과의 접전 끝에 재경기에서 패해 탈락하며 아쉬운 모습도 보여주었다. 스토크 시티는 그 다음 시즌에도 FA컵 준결승에 올랐고, 다시 아스날을 만나 패했다. 이 시즌 스토크 시티는 리그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뱅크스는 1972년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이 상을 골키퍼가 받은건 1956년 버트 트래트먼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던 중 1972년 10월 22일,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한 쪽 눈을 실명하는 안타까운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얼굴을 200 바늘 이상 꿰맸으며, 이 사고 이후로 그의 커리어는 끝이 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1977년 4월에 북미 축구 리그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로 향하기 전까지 그는 축구 선수 생활을 하지 못했지만, 뱅크스는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의 북미 축구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동시에 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되는 등 매우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은퇴했다.
가장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을 때, 불운의 사고로 인해 자신의 커리어를 아쉽게 끝내버린 'Bank Of England'. 그는 2004년에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며, 월드 사커(영국 축구 전문 잡지) 선정 20세기의 위대한 축구 선수 32위, 20세기의 위대한 골키퍼 2위에 랭크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정말 만약 그가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커리어를 이어나갔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의 평판을 받고 있을까?
이상,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 고든 뱅크스 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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