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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터 쉴튼 :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
    축구 연재/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들 2019. 4. 24. 01:51

     

     

     

     

    이름 : 피터 쉴튼 (Peter Leslie Shilton)

    국적 : 영국 (잉글랜드)

    출생지 / 생년월일 : 잉글랜드 레스터셔 주 레스터 / 1949년 9월 18일

    키 : 185cm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식 경기에 출전한 축구 선수. 잉글랜드 축구사에서 고든 뱅크스, 데이비드 시먼과 함께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설의 골키퍼이자,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대표팀 경기를 소화한 축구 선수로 남아있다. 31시즌(1966년~1997년) 동안 클럽 경기만 무려 1249경기에 출전하여 총 1390경기를 소화한 전설 중의 전설인데, 조금 더 와닿게 설명하자면, 펠레의 현역 시절부터 요한 크루이프, 디에고 마라도나를 거쳐 지네딘 지단까지 이어지는 시기 속에 선수 생활을 계속한 것이다.

     

     

    # 데뷔 초반

     

     

    레스터 시티 시절 피터 쉴튼

     

     

     1963년 레스터 시티에서 훈련을 시작한 피터 쉴튼은 1966년에 에버튼과의 경기에서 데뷔했다. 그의 잠재력은 당시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 멤버 고든 뱅크스를 밀어내고 주전을 차지할 정도였는데, 뱅크스가 자신에 대한 구단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스토크 시티로 이적하면서 완전히 주전 골키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레스터 시티는 바로 다음 시즌 FA컵 결승에 올랐지만, 맨시티에게 패해 우승은 실패로 돌아갔고, 리그에서는 2부로 강등되는 등 좋지 못한 상황을 이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불구하고 피터 쉴튼은 재능을 인정 받아 1970년 11월 동독과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성인 국가대표 데뷔전을 가졌고, 그 경기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레스터 시티의 1부 리그 승격과 유로 1972 예선 참가 등 커리어를 쌓아나가며 승승장구했다. 유로 1972에서 고든 뱅크스는 여전히 잉글랜드의 주전 수문장이었지만 후보였던 피터 보네티 등이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탈락하면서 쉴튼이 백업 골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고든 뱅크스가 불의의 교통 사고로 한 쪽 눈을 잃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게 되면서 주전 골키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받는다. 

     

     이후 1974년 11월, 피터 쉴튼은 당시 골키퍼 이적료로는 월드 레코드인 32만 5000 파운드의 금액으로 스토크 시티로 이적했다. 당시 피터 쉴튼은 리버풀의 전설적인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와 함께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 받고 있었는데, 이듬해인 1975년에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전 경쟁에서 클레멘스에게 완전히 밀리며 아홉 번의 경기 중 단 한 번만 선발로 출전하는 등 안좋은 모습을 보였다. 쉴튼이 이적한 스토크 시티는 리그나 컵 등에서 별 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와중에 그의 다음 행선지는 전설의 노팅엄 포레스트였다.

     

     

    # 노팅엄 포레스트 ~ 사우스햄튼

     

     

    1980년 유로피언 컵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다

     

     

     1977년 9월, 피터 쉴튼은 25만 파운드의 금액으로 노팅엄 포레스트와 계약을 맺었다. 당시 노팅엄 포레스트는 브라이언 클러프-UEFA 선정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10인 중 한 명-감독 하에 2부 리그를 제패하고 막 승격한 팀이었기 때문에 피터 쉴튼과 같은 거물의 이적은 조금 의아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축구를 조금 더 깊게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이 시즌의 노팅엄 포레스트는 정말 위대한 클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 당시 노팅엄 포레스트는 리그와 리그 컵 더블을 달성할 정도로 엄청난 클래스를 보여줬고, 42경기 무패라는 미친 기록 또한 보여주었다. 이 중심에는 당연히 피터 쉴튼이 있었으며, 그는 리그 37경기를 소화하면서 단 18실점 밖에 허용하지 않는 엄청난 활약으로 P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활약상 속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의 위상 또한 높아져 클레멘스와 함께 주전 경쟁을 하는 위치로 다시 돌아갔다. 

     

     다음 시즌 노팅엄 포레스트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 우승팀의 자격으로 유로피언 컵-현재의 UEFA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했고, 결승전에서 말뫼를 물리쳐 유럽 챔피언에 오르는 등 어마무시한 행보를 보여주었다. 이 경기에서 피터 쉴튼은 클린시트를 기록했고, 그 다음 시즌인 1979-1980 시즌에도 유로피언 컵 결승에서 함부르크를 이기고 우승 트로피를 차지해 2연속 유럽 챔피언의 자리를 지켰다. 피터 쉴튼의 커리어 정점을 찍었던 시기이고, 그 전성기 중에서도 최절정기라고 볼 수 있는 시기였다. 이후 월드컵 예선에서 피터 쉴튼의 활약과 함께 잉글랜드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12년 만에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고, 본선 조별리그에서 주전으로 출전한 선수는 클레멘스가 아닌 쉴튼이었다. 잉글랜드는 조별리그 3전 3승 1실점이라는 매서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으나 아쉽게도 서독을 만나 탈락한다. 

     

     피터 쉴튼의 다음 행선지는 사우스햄튼이었는데, 이적 후에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꾸준히 차출되며 당시 잉글랜드 국가대표 팀의 보비 롭슨 감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으며, 심지어는 브라이언 롭슨을 대신해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한 적도 다수였다. 37세의, 축구 선수로는 노장의 나이에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주전 골키퍼로 차출될 정도의 여전한 클래스를 자랑했던 쉴튼은 이 대회에서 꽤나 흥미로운 일의 주인공, 아니 정확하게는 조연 정도로 남게 된다. 바로 '신의 손' 사건에서 골을 먹힌 골키퍼가 피터 쉴튼이기 때문이다. 월드컵 역사를 넘어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에서 골을 먹힌 골키퍼로 기록된 피터 쉴튼은 신의 손 사건 몇 분 뒤에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이라고 불리는 마라도나의 폭풍 드리블에 이은 골마저 허용하면서, 축구사의 명장면 두 개를 만들어낸 인물이 되었다. 

     

     

    # 유로 1988 ~ 마지막까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나이 서른 아홉의 노장 피터 쉴튼은 또 한 번 국가대표팀에 승선한다. 그의 100번째 국가대표 경기는 네덜란드와의 경기였는데, 마르코 반 바스텐-발롱도르 3회 수상-의 해트트릭에 의해 패했다. 이듬해인 1989년 덴마크와의 친선 경기에 선발 출전하면서 국가대표 109경기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이전까지 잉글랜드 최다 국가대표 출장 기록인 보비 무어-축구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의 108경기를 넘어선 수치였다. 또한 더비 카운티로 이적해 리그 5위를 기록하는데 앞장 섰고, 이듬해에 열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잉글랜드의 주전 골키퍼로 기용되었다. 피터 쉴튼과 잉글랜드는 1966년 자국 월드컵 이후 24년 만에 4강에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피터 쉴튼은 뛰어난 선방 쇼를 보여주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서독을 만나 승부차기 패배로 탈락했다. 이 당시 쉴튼의 나이는 41세-얼마 전까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던 지안루이지 부폰이 2018년 기준 40세-였다.

     이미 은퇴할 나이에 접어들었던 그는 플리머스 아가일에 감독 겸 선수로 부임했고, 이후 1996-1997 시즌 레이튼 오리엔트에서 마지막으로 몸 담으며 9경기를 출장하고 은퇴했다.

     

     잉글랜드를 넘어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한 전설 중의 전설로 남은 골키퍼. 오랜 시간 잉글랜드의 골문을 지킨 피터 쉴튼을 뒤로 데이비드 시먼이 등장하면서 잉글랜드 골키퍼계의 계보는 이어지게 된다. 만약 잉글랜드가 1970년대의 월드컵에 모두 출전할 수 있었다면, 쉴튼은 아마 역사상 전례 없는 최고의 골키퍼로 남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피터 쉴튼' 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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